무도비즈니스타임즈 안병철 기자 |
해외 태권도 1세대, 이관영 사범의 삶과 철학
프랑스에서 56년간 태권도를 지도하며 민간외교관 역할을 해온 열정의 지도자
해외 태권도의 개척자
9월 늦은 여름 오후. 아직까지 더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날, 서울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이관영한국무술연소원을 찾았다. 해외에서 수십 년간 태권도를 지도해온 내공은 무시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역전의 용사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고, 그의 말과 눈빛에서는 태권도에 대한 깊은 열정과 애국심이 묻어났다. 오랜 세월 타지에서 한국을 알리며 살아온 그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런 애국자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관영 관장은 1966년 월남 파병을 다녀온 뒤, 청도관 중앙도장에서 사범으로 임명받으며 태권도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더 큰 꿈을 품고 경기도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영어로 태권도를 지도하며 국제무대에 나설 준비를 했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1969년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당시 유럽에는 태권도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는 홀로 가방 하나를 메고 기차를 타며 유럽 전역을 돌며 태권도를 알리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때는 태권도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지도하고, 먹고 자는 문제조차 해결하기 어려웠지만 태권도를 알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습니다.”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사명감
프랑스와 유럽 각지에서 태권도를 전파한 이관영 관장은 단순히 무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알리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민간외교관으로 활동해왔다. 경찰과 인터폴에서도 태권도를 지도하며 한국 무도의 가치를 높였고, 해외 곳곳에서 태권도를 통해 한국과의 가교 역할을 해냈다.
그는 “태권도는 내 삶 자체였다. 고생 끝에 웃음이 있듯, 태권도를 전파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곧 나를 성장시킨 힘이었다”고 회상한다.
행동철학으로서의 태권도
이관영 관장은 태권도를 단순한 무술이 아닌 행동철학으로 정의한다. 그는 “인간은 모두 철학자다. 웃는 순간에도 철학이 있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철학이 있다. 태권도는 정직과 투지, 그리고 끝까지 책임지는 삶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태권도의 교육이 연령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년 태권도, 소년 태권도, 청년 태권도, 장년 태권도, 노년 태권도로 구분해 각 인생의 시기와 맞는 교육을 해야 비로소 완전한 태권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사범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오늘날 한국 내 태권도장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는 젊은 사범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 “젊은 사범들이 있음으로써 태권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러분이 있어 앞으로도 100년은 더 갈 수 있다. 욕심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며, 먼저 주고 나눌 줄 아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태권도장 운영 역시 ‘페어플레이 정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회원 수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과 가정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진정한 태권도장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태권도와 삶, 그리고 한국 사랑
프랑스에서 56년간 태권도를 지도하며 평생을 바쳐온 이관영 관장은 여전히 태권도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해외에 오래 머물렀지만 그는 언제나 한국을 잊지 않았고, 태권도를 통해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자부심을 지켜왔다.
“태권도는 내 인생 그 자체였고, 대한민국을 알리는 도구였다. 고생은 많았지만 후회는 없다. 태권도는 결국 가족과 사회, 그리고 나라를 하나로 묶는 힘이다.”
기나긴 타지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예상치 못한 시련과 마주했다. 암이라는 친구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담담히 말했다. “작은 시련일 뿐이다. 태권도의 정신으로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환하게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다시금 도전과 희망의 기운이 느껴졌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따뜻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멋진 태권도 사범의 모습과 자세에 크나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